
책 두께가 얇아서 가볍게 골랐는데, 다 읽고 나니 생각보다 오래 곱씹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바스' 는 소설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독백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구성이라, 읽는 내내 무대 위 배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기본정보
- 제목: 콘트라바스(원제: Der Kontrabass)
- 지은이: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üskind)
- 발표: 1981년 독일 뮌헨의 소극장 의뢰로 집필, 같은 해 초연
- 형식: 콘트라바스 연주자 한 명이 이끄는 남성 모노드라마(1인극) 희곡이자 소설
- 국내 출간: 열린책들, 유혜자 옮김(1993년 첫 출간, 이후 박종대 옮김 개정판)
- 분량: 국내판 기준 100쪽 안팎의 짧은 분량
- 장르: 독백 형식의 희곡소설
- 한 줄 요약: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악기를 연주하는 한 남자가 자신의 악기, 직업, 그리고 짝사랑에 대해 털어놓는 이야기
짧은 분량이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깊이 있는 내용이고, 독백체라 술술 읽히면서도 곱씹을 문장이 많았습니다.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1949년 독일 바이에른의 작은 마을 암바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빌헬름 에마누엘 쥐스킨트는 쥐트도이체 차이퉁에서 일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였습니다. 뮌헨대학교와 엑상프로방스대학교에서 중세사와 근세사를 공부했습니다.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든 작품은 1985년 발표한 《향수》입니다. 살인마 향수 제조사를 다룬 이 소설은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후 《좀머 씨 이야기》, 《비둘기》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작품마다 화제를 모았습니다.
쥐스킨트는 극도로 은둔적인 생활로도 유명합니다. 사진 촬영과 인터뷰를 일절 거절하고, 문학상 수상도 모두 사양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 지인과는 관계를 끊는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립니다.
그런 그가 정작 《콘트라바스》에서는 한 인물의 내밀한 속마음을 1인칭 독백으로 낱낱이 풀어놓았다는 점이 흥미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핵심내용 (줄거리)
무대는 방음 장치가 된 한 남자의 아파트, 그의 옆에는 그가 평생을 함께해 온 악기, 콘트라바스가 놓여 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인 그는 연주를 앞두고 관객, 혹은 독자를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그는 먼저 악기 자체에 대해 설명합니다. 콘트라바스는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현악기이면서도, 독주로 각광받는 일은 거의 없는 악기입니다. 언제나 오케스트라의 가장 뒤편, 가장 구석 자리에서 다른 악기들을 떠받치는 역할만 합니다. 그는 이 악기의 위치가 자신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오케스트라라는 위계 조직 안에서 콘트라바스 주자는 결코 주목받지 못하는 자리이고, 그 역시 조직 안에서 존재감 없는 하급 단원일 뿐입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이 사라라는 젊은 소프라노 가수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같은 오케스트라, 같은 무대에 서지만 그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존재이고, 그는 그녀의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볼 기회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처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오늘 저녁 공연에서 그녀 몰래 그녀만을 위한 소리를 내겠다는 엉뚱하고도 절박한 계획을 세워보지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것이 실제로 실행될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사건의 전개보다, 한 소시민이 자신의 초라한 처지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스스로에게 고백하는 그 과정 자체가 전부인 이야기입니다.
독서 포인트
첫째, 악기에 관한 지식이 곧 인물론입니다. 콘트라바스의 크기, 무게, 오케스트라 내 서열까지 세세하게 설명되는데, 이 모든 설명이 결국 화자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훨씬 흥미롭습니다.
둘째, 독백이라는 형식 자체를 즐겨야 합니다. 사건이 거의 없는 대신, 화자의 생각이 계속 갈지자로 흔들립니다. 자랑했다가 자조했다가, 사랑을 고백했다가 부정하는 그 리듬을 따라가는 재미가 이 책의 핵심입니다.
셋째, 오케스트라라는 조직에 대한 은유입니다. 지휘자, 제1바이올린, 소프라노 독창자로 이어지는 위계는 현대의 어느 조직에나 있을 법한 서열 구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넷째, 짧지만 무대에서 봐야 완성되는 텍스트라는 점입니다. 원래 희곡으로 쓰인 작품인 만큼, 글로 읽을 때와 배우의 목소리로 들을 때 인상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가능하다면 공연으로도 접해보길 권합니다.
- 치밀한 심리 묘사와 의식의 흐름: 맥주를 마시며 자부심에서 자기혐오로, 그리고 낭만적인 짝사랑에서 현실적인 체념으로 무너져 내리는 주인공의 의식 변화가 무척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 현대인의 삶을 대변하는 은유: 콘트라바스는 단순히 크고 무거운 악기를 넘어, 우리가 벗어던지고 싶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무게'와 '밥벌이의 고단함'을 상징합니다. 주역이 되지 못하고 거대한 사회의 밑바탕을 지탱해야만 하는 현대 직장인들의 애환과 완벽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 풍부한 클래식 음악의 지식: 바그너,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위대한 작곡가들에 대한 주인공만의 독창적이고 때로는 냉소적인 해석이 등장하여,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는 또 다른 지적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나의 생각, 느낀점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뭔가를 오래 해온 사람이 그 일에 대해 갖는 애증이었습니다. 화자는 콘트라바스를 두고 끊임없이 불평하면서도, 그 악기가 없는 오케스트라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저는 이 모순적인 태도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매일 반복하는 일에 대해 우리도 비슷하게 굴 때가 많으니까요. 불평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그런 애매한 감정 말이다.
사라를 향한 짝사랑 고백은 안타까우면서도 어딘가 웃음이 나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눈에 띌 수 없는 자리에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오늘 밤 공연에서 그녀만을 위한 소리를 내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이룰 수 없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 그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짠하게 다가왔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이 작품이 끝까지 그가 무대에 올라가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독백은 그가 방을 나서기 직전에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난 뒤에도 그가 결국 어떤 선택을 했을지 상상하게 됩니다. 짧은 분량 안에 이렇게 긴 여운을 남기는 구성이 신기했습니다.
'콘트라바스' 를 읽고 나면, 마음 한구석을 날카롭게 찔린 듯한 서늘한 공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제1바이올린'이나 화려한 '소프라노'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대 가장 뒷줄에 서서, 묵직하고 눈에 띄지 않는 콘트라바스의 활을 켜야만 합니다.
주인공이 정적이 흐르는 극장에서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부르짖고 싶어 하는 충동은, 다람쥐 쳇바퀴 같은 평범한 일상을 단번에 때려 부수고 세상에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외치고 싶은 우리 모두의 내면적 욕망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그가 결국 아무 일도 저지르지 못하고 체념한 채 연주복을 입는 결말은 결코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와 평범함을 인정하고, 묵묵히 오늘 하루의 책임을 다하러 나가는 우리네 삶의 숭고하면서도 씁쓸한 자화상입니다. 너무나 화려하고 성공한 타인들의 삶이 전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내 삶의 평범함이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날 꼭 꺼내 읽고 싶은 책입니다.
연극 〈콘트라베이스〉
이 작품은 애초에 소설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독일의 한 소극장이 배우 한 명을 위한 공연을 의뢰하면서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국내에서도 소설보다 연극으로 먼저 접한 독자들이 많습니다. 국내 공연 제목은 주로 〈콘트라베이스〉로 표기됩니다.
무대는 방음 장치가 된 좁은 방 하나, 등장인물도 배우 한 명뿐입니다. 90분 안팎의 러닝타임 동안 배우는 관객을 상대로 끊임없이 말을 걸고, 실제로 콘트라바스를 연주하는 장면까지 소화해야 합니다.
대사량과 감정의 진폭이 워낙 크다 보니, 국내외를 막론하고 중견 배우의 연기력을 시험하는 대표적인 1인극으로 꼽힙니다. 국내에서는 명계남 외에도 배우 박상원이 〈콘트라바쓰〉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공연한 바 있습니다.

배우 명계남
명계남은 국내에서 이 작품을 대표하는 배우로 꼽힙니다. 그는 1995년 1인극 〈콘트라베이스〉로 이 작품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이후 2006년, 2013년에도 같은 작품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2013년 공연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이 작품이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밝히며, 오랜만의 무대 복귀를 두고 "새로 데뷔하는 심정"이라고 소감을 전한 바 있습니다.
1995년 산울림 소극장에서 명계남 배우의 1인극으로 국내에 첫선을 보인 이 연극은, 한국 연극계에 전무후무한 흥행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는 땀과 침을 튀기며 평범한 중년 남성의 울분, 소외감, 그리고 닿을 수 없는 꿈을 향한 처절함을 신들린 듯한 연기로 풀어냈습니다. 당시 외환위기 전후로 고단한 삶을 살아내던 수많은 대한민국의 30~50대 직장인('샐러리맨'들)이 그의 연기를 보며 자신의 처지를 겹쳐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명계남의 〈콘트라베이스〉는 단순한 번역극을 넘어, 한국 소시민의 정서를 완벽하게 관통한 전설적인 공연으로 깊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명계남은 연극 무대뿐 아니라 영화와 방송으로도 두루 알려진 배우이며, 사회 활동가로서의 행보로도 대중에게 이름이 익숙합니다. 하지만 연극계에서 그는 무엇보다 모노드라마 배우로서 확고한 입지를 갖고 있으며, 〈콘트라베이스〉는 그 경력의 정점에 놓인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텍스트로 먼저 읽은 뒤 그의 공연 영상이나 후기를 찾아보면, 화자의 말투와 감정선이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콘트라바스》는 소설인가요, 희곡인가요? 엄밀히 말해 한 명의 인물이 혼자 대사를 이어가는 1인극 희곡(모노드라마)입니다. 하지만 화자가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쓰여 있어, 일반적인 중단편 소설을 읽는 것과 다름없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Q. 분량이 짧은데 가볍게 읽을 수 있나요? 분량은 짧지만 독백이 밀도 있게 이어져 완독까지 생각보다 집중이 필요합니다. 다만 두세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길이입니다.
Q. 콘트라바스라는 악기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나요? 전혀 문제없습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면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바스가 어떤 위치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Q. 연극과 소설 중 어느 쪽을 먼저 접하는 게 좋을까요? 정해진 답은 없지만, 소설로 먼저 화자의 생각을 찬찬히 따라간 뒤 연극으로 감정의 폭을 체감하는 순서를 개인적으로 추천합니다.
Q.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다른 작품도 추천할 만한가요? 대표작인 《향수》 외에 《좀머 씨 이야기》, 《비둘기》도 짧고 인상적인 작품이라 함께 읽어보길 권합니다.
Q. 작가의 대표작 《향수》와 비교하면 어떤가요?《향수》 가 감각적이고 다소 기괴한 스릴러 서사에 가깝다면, 《콘트라바스》는 철저하게 한 개인의 내면에 집중한 심리 묘사가 압권인 작품입니다. 화려한 사건은 없지만, 문장이 주는 통찰력과 현실적인 공감대는 《콘트라바스》가 훨씬 더 짙고 깊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