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소설인데 판본에 따라 읽히는 결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유일한 장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그렇습니다. 흔히 읽히는 1891년판이 아니라, 1890년에 처음 세상에 나온 판본을 읽고 정리해봤습니다.
기본정보
- 제목: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890(원제 The Picture of Dorian Gray)
- 지은이: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
- 최초 발표: 1890년 7월, 미국 《리핀코트 월간지(Lippincott's Monthly Magazine)》 수록
- 구성: 1890년판 13장 / 1891년 단행본 20장
- 분야: 영국 소설, 유미주의 문학, 고딕 소설
- 특징: 와일드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
- '1890' 표기의 의미: 1891년 단행본이 아니라 잡지에 처음 실린 초기 판본을 옮겼다는 뜻
국내에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제목에 '1890'이 붙은 판본은 이 잡지 연재본을 저본으로 삼은 것입니다. 구매 전 어느 판본인지 확인하시면 좋습니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세계
오스카 와일드는 1854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와 옥스퍼드에서 고전학을 공부했습니다. 재학 중부터 재치 있는 언변과 독특한 복장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의 작품세계를 꿰는 한 문장은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입니다. 예술은 도덕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아름다움 그 자체로 완결된다는 입장입니다. 1891년 단행본에 새로 붙인 서문에서 그는 도덕적인 책도 비도덕적인 책도 없고 잘 쓴 책과 못 쓴 책이 있을 뿐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소설이 외설적이라는 비난에 대한 정면 응답이었습니다.
문체의 특징은 경구(aphorism)입니다. 짧고 뒤집힌 문장으로 영국 상류사회의 위선을 찌르는 방식인데, 이 소설에서는 헨리 경의 대사가 그 역할을 맡습니다.
와일드의 삶도 그의 작품만큼 극적입니다. 1895년 기소돼 2년간 레딩 감옥에서 중노동형을 치렀고, 이 소설이 재판에서 그의 성향을 입증하는 자료로 거론됐습니다. 출소 후 프랑스로 건너가 가명으로 살다 1900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표작 내용 간략 정리
- 《행복한 왕자》(1888): 동상이 된 왕자가 제비의 도움으로 자신의 보석과 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동화집. 국내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작품입니다.
- 《살로메》(1891):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공주의 이야기. 욕망과 파멸의 미학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희곡입니다.
- 《진지함의 중요성》(1895): 두 남자가 가짜 신분으로 벌이는 소동을 그린 희극. 말장난과 사교계 풍자가 가장 빛나는 작품입니다.
- 《심연으로부터》(De Profundis): 감옥에서 연인에게 쓴 긴 편지. 경구로 번쩍이던 작가가 자신의 몰락을 응시하는 글이라 충격이 큽니다.
핵심내용 (줄거리)
화가 바질 홀워드는 눈부신 미모의 청년 도리언 그레이를 모델로 초상화를 완성합니다. 바질은 이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너무 많이 담았다고 느껴 전시를 망설입니다.
그 작업실에서 도리언은 바질의 친구 헨리 워튼 경을 만납니다. 헨리 경은 쾌락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목적이며 젊음과 아름다움은 곧 사라진다고 속삭입니다. 그 말에 흔들린 도리언은 완성된 초상화를 보며 기도합니다. 늙는 것은 저 그림이고 자신은 영원히 이대로였으면 좋겠다고.
그 바람은 이루어집니다. 도리언은 가난한 무대 배우 시빌 베인과 사랑에 빠지지만, 헨리 경의 영향 아래 그녀의 연기가 시들해 보이자 잔인하게 버립니다. 시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날, 도리언은 초상화의 입가에 없던 잔혹한 주름이 생긴 것을 발견합니다.
이후 도리언은 그림을 다락방에 감추고 천으로 덮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그의 얼굴은 소년처럼 맑은데, 그림 속 얼굴은 점점 추악해집니다. 그는 아편굴을 드나들고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망치면서도 사교계에서는 흠 없는 청년으로 통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비밀을 알게 된 바질이 그림을 보여달라며 다락방으로 올라옵니다.
결말
※ 결말이 전부 언급됩니다.
다락방에서 변해버린 초상화를 마주한 바질은 경악하며 도리언에게 기도하고 참회하라고 말합니다. 도리언은 그 순간 치솟은 증오로 바질을 칼로 찔러 죽입니다. 시신은 화학자 친구를 협박해 처리합니다.
살인 이후에도 도리언의 얼굴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은 손에 피가 묻은 모습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두려움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밤 다시 선하게 살아보겠다고 결심합니다. 선한 일을 한 번 했으니 그림도 나아졌으리라 기대하며 천을 걷습니다. 그런데 그림에는 위선의 표정이 하나 더 늘어 있을 뿐입니다.
절망한 도리언은 이 그림만 없애면 과거도 끝난다고 생각하고, 바질을 죽인 그 칼로 초상화를 찌릅니다. 비명을 들은 하인들이 올라가 보니 벽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년의 초상화가 온전히 걸려 있고, 바닥에는 늙고 일그러진 얼굴의 노인이 심장에 칼을 꽂은 채 죽어 있습니다. 하인들은 손에 낀 반지를 보고서야 그가 도리언임을 알아봅니다.
소설 해석
초상화는 양심입니다. 도리언이 저지른 일의 결과가 몸이 아니라 그림에 기록된다는 설정은, 죄의 대가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 쌓인다는 뜻입니다. 천을 덮어 숨긴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세 인물은 와일드 자신의 세 조각입니다. 와일드는 한 편지에서 바질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모습이고, 헨리 경은 세상이 보는 자기 모습이며, 도리언은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구도를 알고 읽으면 세 사람의 대화가 전혀 다르게 들립니다.
결말은 유미주의에 대한 배신일까. 아름다움만을 추구한 인물이 파멸한다는 결말은 도덕적 응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와일드는 서문에서 예술에 도덕을 요구하지 말라고 못 박았습니다. 이 모순이 이 소설을 백 년 넘게 논쟁거리로 남게 만든 지점입니다.
1890년판은 이 긴장이 덜 봉합된 상태입니다. 1891년판에 추가된 서문과 선악 구도를 보강하는 장들이 없으니, 바질이 도리언에게 품은 감정의 밀도가 훨씬 노골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1890년판이 작가의 의도에 더 가깝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독서 포인트
첫째, 두 판본의 차이를 알고 읽으세요. 1891년판에는 유명한 서문이 추가되고, 시빌의 오빠 제임스 베인이 복수하러 나타나는 서사가 새로 들어갑니다. 분량이 13장에서 20장으로 늘어난 이유입니다.
둘째, 헨리 경의 대사를 밑줄 그으며 읽으세요.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위험한 문장들이 그의 입에서 나옵니다. 읽다 보면 도리언이 왜 홀렸는지 이해가 됩니다.
"유혹을 떨쳐버리는 유일한 방법은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다", "젊음이야말로 소유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다" 등 헨리 경이 쏟아내는 재기발랄하고도 위험한 독설들은 당시 사회의 위선을 꼬집는 동시에 독자의 윤리관을 뒤흔드는 기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셋째,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세요. 중반 이후 수십 년이 지나는데 도리언만 그대로입니다. 주변 인물들이 늙고 죽어가는 대비가 공포의 핵심입니다.
넷째, 고딕 소설로 읽어보세요. 다락방, 천으로 덮은 초상화, 잠긴 문이 전형적인 고딕 문법입니다.
압도적인 시각적 묘사와 감각적 문체
화가의 작업실에 퍼지는 장미 향기, 도리언이 수집하는 보석들의 색채, 실내 인테리어의 화려한 태피스트리 등 와일드 특유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각적 묘사들은 텍스트를 읽는 것만으로도 화려한 유화 한 점을 감상하는 듯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합니다.
심리적 서스펜스
아름다움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도리언의 강박증, 다락방에 숨겨둔 그림이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피해망상, 그리고 그림이 변해가는 과정을 확인하며 느끼는 혐오와 매혹의 복합적인 심리 묘사가 압권입니다.


영화, 공연
영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1945년 미국 영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앨버트 르윈 감독)입니다. 흑백으로 촬영하면서 초상화가 등장하는 장면만 컬러로 삽입하는 연출로 유명하며, 아카데미 흑백촬영상을 받았습니다.
2009년 영화 〈도리안 그레이〉(올리버 파커 감독)에서는 벤 반스가 도리언을, 콜린 퍼스가 헨리 경을 맡았습니다. 원작보다 시각적 자극을 강조한 각색입니다.
무대에서도 꾸준히 공연됐습니다. 최근 가장 화제가 된 건 킵 윌리엄스 연출의 1인극으로, 배우 한 명이 수십 개 역할을 영상 기술과 결합해 소화하는 형식입니다. 세라 스누크가 이 작품으로 영국 올리비에상 여자연극배우상을 받았고 이후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호평받았습니다. 국내에서도 2016년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초연됐습니다.
나의 생각, 느낀점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불편했던 건 헨리 경의 말이 꽤 설득력 있게 들렸다는 사실입니다. 젊음은 짧고 아름다움은 곧 사라지니 지금 누려야 한다는 말, 요즘 광고 문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도리언을 비난하려 했지만 어느 순간 그 유혹이 낯설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가장 소름 돋은 대목은 도리언이 선하게 살아보겠다고 결심한 뒤 그림을 확인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보상을 기대하고 한 선행이 위선으로 기록된다는 설정. 와일드는 여기서 결정적으로 잔인합니다. 참회조차 계산이 섞이면 또 하나의 죄가 된다는 걸 보여주니까요.
1890년판으로 읽은 선택도 만족스러웠습니다.
1891년판에는 결말을 도덕적으로 정리해주는 장치가 더 많은데, 이 판본은 그런 완충 없이 바로 찔러 들어옵니다. 특히 바질이 도리언을 바라보는 시선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이 소설이 교훈담이 아니라 사랑과 집착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다만 읽기 쉬운 책은 아닙니다. 사교계의 긴 대화와 당대 유럽 문화에 대한 언급이 많아 중반에 속도가 떨어집니다. 저는 헨리 경의 경구를 모으는 재미로 그 구간을 버텼습니다.
SNS에 올릴 사진 한 장을 수십 번 고치는 지금, 이 소설이 130년 넘게 읽히는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는 모두 보여주고 싶은 얼굴과 실제 얼굴 사이에서 살고 있고, 그 간격을 어딘가에 감춰두고 있으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Q. 두 판본 중 어느 쪽을 읽어야 하나요?
처음이라면 서문이 포함된 1891년판이 무난합니다. 작가의 초기 의도나 검열 이전의 결을 확인하고 싶다면 1890년판을 권합니다.
Q. 1890년판이 완전한 무삭제판인가요?
아닙니다. 잡지 게재 전 편집자가 이미 수백 단어를 삭제했습니다. 타자 원고 그대로를 옮긴 영문 주석판이 따로 나와 있습니다.
Q. 와일드의 다른 작품도 함께 읽으면 좋을까요?
희극의 재미를 원한다면 《진지함의 중요성》, 작가의 내면을 보고 싶다면 《심연으로부터》를 추천합니다.
Q. 1890년 판본과 1891년 판본 중 어떤 것을 읽는 것이 좋나요?
작가의 원래 의도와 순수한 감성을 느끼고 싶다면 검열을 거치지 않은 1890년판(오리지널)을 추천합니다. 인물 간의 관계와 심리가 훨씬 직관적입니다.
반면, 더 풍부한 에피소드와 곁가지 서사, 보강된 철학적 묘사를 원하신다면 6개 장이 추가된 1891년 판본을 읽으시는 것도 좋습니다. 국내에는 두 버전 모두 훌륭한 번역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Q. 철학적인 내용이 많아 읽기 어렵지 않나요?
초반부 헨리 경이 늘어놓는 예술과 쾌락에 관한 긴 대화들이 다소 현학적으로 느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도리언이 시빌 베인을 만나고 그림이 변하기 시작하는 중반부부터는 심리 스릴러나 공포 소설을 방불케 할 만큼 전개가 빠르고 서스펜스가 강해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